2024. 10. 25. 10:45ㆍ말씀 묵상
나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할아버지의 여동생,
그러니까 아버지의 고모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은 것만,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전부입니다.
어린 시절 주일 점심 때,
교회에 다녀가시던 할머니와 고모 할머니께서,
중간 지점인 우리집에 들러서 점심을 드시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시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목수이셨다는데,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고모 할머니께서,
가끔 오빠네 집에 들러 보면은,
오빠는 돈벌려고 외지에 나가시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린 조카들이,
휑한 얼굴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 있더라는 겁니다.
아버지의 형인 백부께서는,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서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그나마 더 어린 우리 아버지는,
눈을 껌뻑껌뻑(?) 하며 견디고 있더라는 겁니다.
"너희 아버지, 굶주림으로 고생 많이 했단다"
저희 아버지께서 기미년 생이시니,
삼일운동 후 1920년 대 중반으로 추측되는,
일제의 수탈이 한참이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에게 굶주림은?
본능과 함께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으리라!
자식의 배를 곯지 않게 한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본능을 넘어선 거룩한 사명이 되었을 터!
그 덕(?)에,
어린 시절 밥은 굶지 않고 살았습니다.
다만 의료보험제도가 없던 시절,
어머니의 발병(?)과 수술로 말미암은 병원비용은,
아버지가 자식들을 부양하는 땅을 처분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어려운 가정에서는,
논과 밭을 팔아 자식들 교육하던 시절이었으니,
우리 집도 마찬가지.
더구나 어머니의 치료비와 생활비,
그리고 누적된 자식들 교육비는,
마침내 아버지가 생명처럼 여기던,
자식들의 생명을 지키던 논과 밭까지 처분해야 했습니다.
땅을 처분하고,
생명의 터전을 잃었다 여기신 아버지가,
망연자실하던 그 모습을 어찌 잊으리요?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겹쳤든지,
마침내 아버지께서 정신줄을 놓아버렸습니다.
자식들의 입을 건사하는 것을,
거룩한 사명처럼 여기고 사셨던 아버지가,
정신줄을 놓아버린 그때,
바로 그 현장의 모습과,
훗날 이어진 일들이,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데 처연하게 떠오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마 7:9-10)
아버지!
고맙습니다.
아버지의 그 단단한 각오 덕분에,
저희 형제들이 배 곯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저희 아버지도 배움이 짧았습니다.
하지만 자식들의 입에 밥을 먹여야 한다는,
본능과 거룩한 사명은 누구보다 확실했습니다.
물론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우리 주님 말고,
또다른 주님(?)에게 지배를 받을 때,
어머니와 다투던 모습은,
지금도 또렷하며,
무엇보다 싫었습니다.
자식들조차 못마땅하게 만들던,
못된 그 주님(?)의 지배를 벗어나,
즐기는 정도로만 사신 것도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좋으신 주님을 만나고,
좋으신 주님을 믿고 바라보다가,
천국 가신 아버지가,
오늘 따라 유난히 생각납니다..
다 말씀 묵상 덕분입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살아계실 때,
한번도 말해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하늘나라에 먼저 가신 아버지!
그래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사랑합니다.
죄송한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아버지!"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 목사
2024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