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2. 13:36ㆍ말씀 묵상
잠시 전화를 받는 사이에 작업한 묵상 내용이 사라졌습니다.
기기에 미숙한 까닭에,
나는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가,
포기하고 다시 작업을 시작합니다.
두어 시간 작업한 것이,
아깝기도 하거니와,
억울하기도 하고,
다소 짜증도 납니다만.
어떡합니까?
모르고 서투른 내가 감수할 수업료인 것을!
몇날 몇주 몇달 작업한 것도 아니고,
그저 두어 시간 작업한 것도 이리 아쉽거늘?
하물며 몇년이나 몇달 혹은 평생의 수고가,
무시되거나 부정 당하거나 사라질 때.
그 상실감이나 비참한 심정을 어찌 다 헤아리랴?
가벼운 말로 감싸려 말고,
조용히 손을 내밀고,
상한 마음을 다독여야 하리라!
각종 반려 동물들을 많이 기르는 세상입니다.
반려 동물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대체적으로 개일 것입니다.
오수 의견비가 아니어도,
가끔 사람보다 나은 개 이야기를 많이 접합니다.
새 집을 짓고 잠을 자던 친구가,
한 밤중에 급하게 짖어대고,
잠자던 방문까지 사납게 긁어대는 바람에,
방문을 열고 나와보니,
거실 천장에 불이 붙어서 집이 무너지기 직전이더랍니다.
두 마리 진도개 덕분에 생명을 건졌기에,
지금도 개를 생명의 은인으로 동행합니다.
퇴직하고 밭을 일구며 사는,
또 다른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밭에서 일을 마치고,
수돗가에서 몸을 씻고 의자에 앉으려는데,
집에서 기르던 진도개가,
갑자기 으르렁거리며 몸을 날려 달려듭니다.
왕년에 운동을 하던 가락이(?) 있어서,
잽싸게 몸을 피하고 보니,
살모사가 의자에 똬리를 틀고 있더랍니다.
그 개가 주인의 생명을 구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는 억울합니다.
개를 인생의 동반자(?)로 둔 반려 가족들에게는,
마태복음 7:6절 말씀은,
얼마든지 거부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가 할까 염려하라"
주님께서 개와 돼지를 무시하라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성경과 유대 문화에서 부정한 동물로 언급된 것을,
거부감 없이 수용하고 선포하신 말씀일 뿐입니다.
개 밥에 도토리.
개는 도토리를 먹지 않으니,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말입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스꽝스럽습니다.
거룩한 복음을,
의도적으로 조롱하려는 사람에게,
전해주지 못해서 안절부절 말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진리를,
목숨 걸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한다고 너무 안쓰러워 말라.
주님의 피 묻은 복음은?
받을만한 사람에게 주어야 복음이 됩니다.
받을 생각도 없거니와,
의지적으로 모독하려는 자에게 주러다가는,
주님과 복음이 모독을 받게 됩니다.
터키 이스탄불 박물관에서 보았던 다이아몬드가 떠오릅니다.
다이아몬드 값어치를 몰라서,
스푼 몇 개와 바꾸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멋지고 예쁜 다이아몬드가 전시된 것이었습니다.
종려 주일에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무리들이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고 소리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라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 21:9)
누구를 높입니까?
누구에게 찬송합니까?
겸손하여,
평화의 왕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며 찬양합니다.
혹시라도 나귀가,
나귀에게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펴고,
호산나 찬양을 부르는 것으로 착각하면?
그런 터무니없는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으랴?
만물이 정위치하는 것이 질서요,
피조물이 피조물 노릇하는 것이 샬롬입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하는 은혜와 축복을 오늘도!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 목사
2024년 10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