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22. 10:56ㆍ말씀 묵상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어떤 예수님의 제자도 이 말씀에서 자유롭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사랑으로 오신 주님께서,
"원수를 박멸하기까지 목숨걸고 싸우라"고 하실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주님께서는,
체포조로 온 사람조차,
베드로가 분노하여 칼을 휘둘러서,
귀가 잘린 사람의 귀를 붙여주셨습니다.(눅 22:51)
그리고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 새번역)
면류관이라는 뜻을 가진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는 고통 중에서도,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며,
무릅 꿇고 기도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행 7:60)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나란히 함께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원수 사랑?
이성과 감정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본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가상 7언에서 기도의 형식을 빌어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중에,
돌로 치는 원수와 핍박자들을 용서하며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원수 사랑과 기도?
뗄래야 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도해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기 싫거든 기도하지 마세요.
사랑하기 싫거든 기도하지 마세요.
계속 가슴에 한을 품고 살려거든 기도하지 않으면 됩니다.
마음에 맺힌 것들 그대로 안고 사는 것이 좋거든 그대로 사십시오.
그냥 잊고 살아도 별 문제가 없다면?
그런 사람과 엮이지 않고 사는 것이,
정신 건강에 훨씬 좋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슴에 쌓인 한이나,
마음 속에 풀지 못한 응어리로,
잠을 자지 못하거나,
전전긍긍하게 된다면?
기도와 말씀대로 해결하는 것이 상책이리라!
오늘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는?
특별히 교회를 출입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교양있는 성도라면?
원수를 맺으며 살 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 교회 내부를 들여다 보면은?
대부분 사소한 일을 침소봉대합니다.
자신의 고집이나,
알량한 자존심을,
주님 향한 믿음과 열심으로 포장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철천지 원수처럼 취급합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 사람 또한 주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구원받은 형제입니다.(고전 8:11)
물론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사기를 치거나,
재산상 손실을 끼친다거나,
명예를 훼손한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어떡할 것입니까?
원수조차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거늘!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시거늘!
고막이 손상되었던,
아찔했던 순간의 군대 경험을 나누었던 묵상을 이렇게 맺었습니다.
"순종?
계속 순종하려면 쉽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딱 한번만 순종합시다.
다음은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입니다."
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리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주님의 간섭에 순종했던 것만 감사할 따름이지요!
나 자신도 계속 못하는 일을,
다른 분에게 계속하라고 강권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많이 망설이고,
어떻게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까 계속 고민하며,
주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하며 기도하던 중,
내 좋은 주님께 토스하는 것이 최선!
사실 주님께서 은혜 주시면?
그보다 더 한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주님께서 강권하시면?
우리의 생각이나,
우리의 판단은 물론,
우리가 선택하는 행동도 달리지고 변화할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맺었습니다.
"그때그때 딱 한번만 순종합시다.
다음은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입니다."
묵상을 받고 나누는 많은 분들이,
바로 그 대목에 많은 감동을 받고 댓글을 달았더군요.
사실 피와 땀과 눈물과 정성을 쏟은 묵상에,
관심을 갖고 간단한 댓글 하나 달아주는 것만으로도,
나눔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보상받습니다.
사람은 가슴과 가슴이 통하거든요.
우리들의 영혼은 피차 심는대로 거두게 되거든요.
육신의 부모조차도,
어쩌다 아들 다운 노릇하는 아들을 흐뭇해 하며 자랑합니다.
가끔 딸 노릇 제대로 하는 딸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합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하나님 또한 우리가 어쩌다 한번만 자녀 노릇 잘하면 미소지으시리라!
하물며 기도하며 수시로 순종할 때는 얼마나 자랑하시랴?(습 3:17)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목사
2024년 7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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