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5. 10:39ㆍ말씀 묵상
금식은 모든 종교에서 중요한 역할과 기능을 합니다.
유대교에서도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은 중요한 규범이거니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경건의 요소입니다.
건강이 종교가 되고,
건강이 하나님이(?) 된 요즘 세상에서는,
금식이 하나의 트렌드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건과 믿음을 드러내는 것 중에서,
사람에 따라서 잘 감당하는 것들이 다릅니다.
어떤 이는 예배에 진실하고,
다른 사람은 봉사에 목숨을 겁니다.
어떤 이는 기도생활에 열심이고,
또 다른 사람은 금식에 매달립니다.
헌금생활에 진심인 사람도 있거니와,
구제에 앞장 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 하고 열심인 것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풍토가 중요합니다.
나는 봉사가 부족한 데,
저 사람 덕분에 봉사가 채워지네!
나는 헌금생활에 모자라거늘,
저 분은 헌금생활에 진심이구먼!
나는 구제에 손을 떨거늘,
저 사람은 구제하는 손길이 담대하구나!
나는 금식을 평생에 손 꼽을 수 있거늘,
저 분은 금식을 규칙적으로 감당하는구먼!
서로를 인정해주고 격려하면?
교회생활이 훨씬 더 은혜롭고 평안하고 즐거우리라!
다른 사람이 잘 하는 것을 모델로 삼아 분발하고,
내가 잘 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면,
그 교회는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로 충만한 교회가 되리라.
주님을 위해서 많은 것을 준비하느라,
마음이 분주했던 마르다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의미심장합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2)
해석은 다양합니다만,
빼앗기지 아니할 신앙과 경건의 요소를 간직하라는 것은,
확실하고 분명해 보입니다.
빼앗기지 아니하고 간직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간직한 것은 이것이라고 대답할 것은 무엇입니까?
금식 논쟁의 물꼬는 요한의 제자들이 텄습니다.
왜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 논쟁의 물꼬를 텄을까요?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많아지고,
요한을 추종하는 무리는 소수로 전락한 까닭입니다.
물론 세례 요한의 유언처럼 들리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는 것입니다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선구자 세례 요한의 역할은 거기까지로 마무리가 됩니다.
선구자 요한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것으로 정리됩니다.
임무 교대.
바통 터치.
이제는 물러나야 할 시간.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역사의 주 무대에서 조용히 비켜설 뿐입니다.
바로 그런 선구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한줄평을 배워야 합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
모든 공동체는 리더십이 교체되는 혼란기가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는 전임자와 후임자의 관계 설정이 훨씬 복잡합니다.
전임자가 명심할 것은 이것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그렇다면 후임자는?
자기가 잘 난 것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이루어 놓은 것 또한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임자의 수고와 눈물과 땀 위에 서는,
전임자의 은혜와 직분이라는 어깨 위에 섰을 뿐입니다.
그러니 전임자의 수고와 땀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감사하며,
고개 숙여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선구자 요한에게 남긴 한줄평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
소수로 밀려나면 시빗거리를 찾게 되는,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 요한의 제자들을 보면서,
평화롭고 은혜로운 공동체를 위해 배울 교훈입니다.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 목사
2025년 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