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보다 긍휼

2025. 2. 4. 10:53말씀 묵상

세관에 앉은 세리 마태를 부르신 사건의 결론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공관복음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마태를 부르셔서 함께 잡수시고,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하여는,
복음의 요체로 응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대속물로 보내신 것이 복음입니다.  

그 대속물로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 것이 죄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요 16:9)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아니하는 것이, 
죄라고 깨달아지는 것이 은혜요, 
성령의 감화 감동하신 역사입니다.(엡 2:8-9, 고전 12:3)

마태를 부르신 사건은,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도, 
거의 흡사하게 기록되었습니다만. 

마태는 자신을 부르신 사건을 기록하면서, 
호세아 6:6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마태복음에 호 6:6절 말씀이 두 번이나 인용된 것을 볼 때,
이 말씀이 마태의 가슴에 깊이 꽂혔으리라.(마 12:7)

제사보다 긍휼을!
제사보다 인애를!

안정된 삶이 보장된 세무공무원을 그만 두고, 
주님을 따르던 마태의 가슴에 평생 꽂힌 말씀인 듯합니다.

모름지기 마태의 가슴에 깊이 박힌 말씀이었을 터! 

그러니 성령의 감동으로 마태복음을 기록하면서,
두 번이나 인용하되,
특별히 자신을 부르신 장면을 회고하면서,
신앙고백적으로 간증하듯 기록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심령에 꽂힌 말씀을, 
반복하고,
되새기며,
리마인드하지 않습니까?

누가복음에 기록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제사보다 자비와 인애와 긍휼의 결정타입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며, 
예수님을 시험하는 율법사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

자기 동족만 이웃이라 여긴 율법사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물으니,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대답합니다.

제사나 번제 혹은 종교의식에 여념이 없는,
제사장이나 레위인 말고,
"자비를 베푼 사람"(눅 10:37)이 이웃이라고, 
율법사의 입으로 고백하게 하십니다.

유대인에게 사마리아 사람이란?

도저히 상종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요,
말을 섞고 싶지 않는 사람이며,
입에 담고 싶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당연히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함이 마땅함에도,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궁색하게 대답한 것이리라.

바로 그런 상황에서,
주님의 거역할 수 없는 묵직한 한 방!

평생 가슴 깊이 새기고, 
은혜로 고백하며, 
대답할 말을 준비하도록,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제사보다 긍휼입니다.
이념보다 복음입니다.

국민의 절반을 타도와 저주의 대상으로 여기면서도,
믿음과 열심으로 착각하는 모습을,
주님께서 뭐라 하실까요?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 목사

 

2025년 2월 4일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랑을 빼앗길 날  (0) 2025.02.06
요한의 제자들  (0) 2025.02.05
병든 사람에게  (0) 2025.02.03
일어나 따르니라  (0) 2025.01.23
세관에 앉은 마태  (0) 2025.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