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과 간음 사이

2024. 7. 9. 11:28말씀 묵상

묵상을 나누는 인터벌이 느슨하게 늘어졌습니다.

6월부터 계속된 설교에 약간 분주한 것이 첫번째 공식적인 이유라면.

두번째 까닭은? 
늦은 나이에 결혼한 딸이, 
첫째로 딸을 낳아 기르던 중,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둘째를 가져서, 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도와주려고 서울에 온 까닭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변명은?

세번째로 언급은 합니다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까닭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목사들처럼,
저 또한 헌금 설교를 하지 않는 편입니다만.

그렇다고 아예 안한다거나,
의도적으로 회피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혼에 관한 설교는?

사실 이혼에 관한 설교가 가장 어렵고,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설교 주제입니다.

왜요?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려고 둘러보면은.

왼쪽에도 이혼한 분이 계시고,
오른쪽을 둘러봐도 역시 이혼의 이력을 가진 분이 앉아 있습니다.

새로 등록한 교우 중에도,
과거의 상처를 뒤로하고,
새출발의 의지와 믿음으로 오신 분들이 적지 아니합니다.

내용을 뜯어보면?
능동적으로(?) 이혼한 사람도 있거니와,
수동적으로 이혼을 당한(?) 분도 계십니다.

나란히 앉아서 예배는 드리지만,
심리적 이혼상태 이거나,
마지막 수순(?)을 밟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어떡합니까?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눈을 감고,
못본 척하며,
시간이라는 처방으로,
임시방편할 뿐입니다.

목사로서 직무유기 아닌가?

하지만, 
섭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만은,
최소한 피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신이라
여긴 까닭입니다.

가정 문제로 심방하거나 상담할 때는?

교우들을 대동하지 않습니다.
프라이버시를 지켜줘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아내와 둘이서만 갑니다.

심방하고,
상담하며,
가정의 형편과,
부부관계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은?

정말 저런 나쁜 사람(?)이 있나?
뚜껑을 열리게 만드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만약에 내 누이라면?
저런 놈(?)과 계속 살으라고 할 수 있을까?

고개를 좌우로 흔들게 만드는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쉽게 이혼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또한 목사로서 쉽지 않습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 5:31-32)

어쩌라고?

음행도 없고,
특별한 잘못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한(?) 사람에게,
이혼을 문제 삼는 것은,
그 사람을 두번 죽이는 일이리라.

한번 죽는 것도 억울하거늘,
두번 죽이는 것은 분통 터질 일 아닌가?

그렇다고 대오각성하고,
분골쇄신하여, 
새 사람이 될 가능성은 아득하거늘.

그때까지 십자가를 지고 살으라고,
그것이 신앙적으로 바른(?) 선택이라고,
입바른 말을 하기에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냥 정리하시지요"

두 마음으로 내린 처방입니다.

하나는?

정말 정리하고 새출발하는 것이,
남은 생애라도 홀가분하게 사는 길이라고 진실로 여긴 까닭이고요.

다른 하나는?
충격요법으로 내린 처방입니다.

목사님도 소망이 없다며,
정리하라 하셨거늘!

내가,
내 의지로,
십자가를 졌노라는,
결의와 다짐으로,
견디고 이기도록 분발케하려는 이중처방인 셈입니다.

기대한 것처럼,
오랜 세월 후에,
변화와 결실을 보신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짊어졌을 십자가와 눈물과 갈등을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짧은 인생,
벗어야 할 무거운 짐과,
얽매는 것들을 벗어버리도록,
홀가분한 처방을 내리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을 금할 길이 없는 까닭입니다.

불과 유황으로 소돔을 엎으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실까요?

생각만으로도 아찔합니다.

이혼이 즐비한 세상입니다.
음행을 부추키는 것들을 오히려 자랑하는 세태입니다.

믿음 없는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쳐도,
하나님의 자녀된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조금 달라지면 좋겠습니다.

이혼을 망설일(?) 만큼,
결혼 전에 먼저,
이성적으로 잘 분별하고, 
최대한 인간적으로 숙고하며,
충분히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짝으로 알고,
확실하게 믿고 결혼한다면?

지금의 한국사회 보다는,
훨씬 밝고 성숙한 세상이 되리라.

이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으니까요.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목사 

 

2024년 7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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