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28. 09:58ㆍ말씀 묵상
그리스도인의 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마 5:20)
그러면 어떻게 더 나아야 합니까?
그 구체적인 예들이 마 5:21-48절까지 여섯 가지 대립 명제로 등장합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즉 모세로 대표되는 율법과,
그 율법 순종 여부에 대한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과,
바로 그 율법과 예언의 말씀을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을 통해서 해석된 구전까지 지칭합니다.
옛 사람들에게 말해진 것.
즉 모세 이후 모든 유대인들을 총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듣는 청중들에게도 익숙한 말씀인,
제 6계명 "살인하지 말라"를 첫번째 대립 명제로 언급합니다.
십계명에 언급된 제 6계명에는 심판이란 말은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유전에 언급된 내용으로 유대인 청중에게 익숙했을 것입니다.
살인하고서도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런 세상은 공의가 무너져 점점 무질서한 세상으로 변하리라!
살인 행위에 대한 최후의 심판은 확실하거니와,
이 땅에서도 공의와 질서를 위한 합당한 재판은 필수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미숙한 이해에 기반한,
인권 지상주의자들의 지나친 인권주장(?)은,
한편으로는 인권을 지켜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선량한 대다수 인권을 위협하는 현실에 무책임하다 할 것입니다.
아무튼 옛 사람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과,
그 율법의 준행 여부에 대한 선지자들의 예언과,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유전을 통해 익숙하게 들은 바로는,
살인이라는 구체적인 행위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으로,
동기와 의도를 강조하십니다.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도 문제려니와,
살인이라는 행위를 유발하는,
생각이나 말 혹은 생각 저변의 의지까지 포함해서,
혹시라도 마음 속에 께름칙하게(?) 자리잡은 것들까지를 포함하십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것.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것.
형제를 미련한 놈이라 칭하는 것.
노하는 것.
성내는 것.
화를 내는 것.
순간 자기도 모르게 "욱"하고 발산하는 분노와 성질머리도 문제려니와,
해결하지 못하고 마음 깊이 간직한 분노와,
가슴 깊이 한으로 정착된 못마땅한 감정 덩어리가,
문제를 확대 재생산한다는 것을 예견하신 말씀입니다.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
라가.
속이 빈.
무가치한.
쓸모없는 자.
아무튼 형제나 이웃에 대한 최악의 욕설이라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내 마음 속에 형제나 이웃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을 이념화하거나,
혹은 지역 감정과 동일시하거나,
지나친 선민의식에 빠져서 다른 사람을 이방인 취급하거나,
근본주의적 사고에 매몰될 때.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자기도 모르게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주님 말씀을 명심하고 생각이나 의식을 바꿔야 하리라.
미련한 놈이라.
어리석은 바보라고 말하는 것.
희망이 없는 바보.
신령한 은혜나 축복을 깨닫지 못할 사람.
도덕적으로 어리석은 바보.
그래서 소망이 없다고 임의로 제끼는 것을 말합니다.
노하거나,
라가라 하거나,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고,
심판을 받게 되며,
지옥불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주님의 선언입니다.
구체적인 행위가 없을지라도,
그런 행위를 유발할 위험이 많은 마음과 말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말은 상승작용을 합니다.
마음 속에 일어나는 생각 또한 오만가지 소설을 씁니다.
그러므로 말과 마음을 말씀으로 다스리고,
입에서 나오는 말과,
마음 속에 일어나는 생각들을,
성령으로 다잡는 것이 은혜요 축복이며 경건입니다.
바로 그런 은혜와 축복을 누리고 사는 삶이 경건한 사람이요 믿음의 길입니다.
잠언에 기록된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노하기른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
야고보서에 기록된 결정타로 마치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19-21)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목사
2024년 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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