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부인

2025. 4. 29. 10:36말씀 묵상

인간에 대한 배신감으로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를 앓는 사람이 제법 많습니다.

각종 선거에 나섰다가,
적어도 저 사람은 나를 밀어주겠지 믿었는데,
결과가 달라서 사람 만나기가 싫어집니다.

이 사람은 믿어도 되는가?
저 사람 끝까지 믿을 수 있을까?

2차 대전 패전 이후,
자민당 일당 지배가 일상화된 일본에는,
한국에 넘치는 시민사회 운동이 거의 없습니다.

사무라이!
 
이 한마디로 대변되는 일본의 전통이,
칼을 가진 권력자의 반대편에 서는 일이,
거의 절멸(?)이라고 여기는 까닭이리라.

카톨릭이든 개신교든,
한국보다도 선교 역사가 훨씬 앞 선 일본 아닌가?

그런데 왜 아직도 신 구교 합산해도 1%를 넘지 못할까?

<침묵>이라는 소설을 쓴 "엔도 슈사쿠" 문학관을 방문는 길에,
<침묵>에 나오는 고문도구로 사용되는,
바닷가에 세워진 나무 기동들을 보았습니다.

썰물에는 빠져 나갔던 바닷물이,
밀물이면 차오르면서,
그 기둥에 매달아 둔 신자들이,
배교할 때까지 방치한다는 것입니다.

목까지 차오르다가,
입과 코까지 넘나드는 물고문에,
길게는 일주일이 지나서야 죽게 됩니다.

성화를 밟고 지나가는 것으로, 
배교를 확인하고 풀어주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배교 유인책입니다.

이미 배교를 확인하고도,
지도자나 더 신실한 신앙인이 배교할 때까지,
배교한 가족이나 신자들을 계속 고문합니다.

가족들을 살리려거든,
다른 신자들을 살리려거든,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이 기독교가 내세우는 사랑 아니냐며,
지인들이 당하는 고문을 들려주며 배교를 종용합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뭐 하십니까?
벼락이라도 쳐서 심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렇게 악랄하게 배교를 강요하는 박해자들을, 
지금 당장 박살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벼락도 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십니다.

우리는 이토록 죽을 지경인데 하늘은 왜 그리 파란지요?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아파할 때,
주님께서도 함께 아파하시고 우셨다고 소설은 마무리 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박해와 조롱과 송사가 계속 되는 세상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를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오늘 우리는 조롱과 박해가 없는 나라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박해가 일상인 나라에서,
목숨을 걸고 선교하며 신앙을 지키는 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빚을 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름도 모습도 감춘 신앙도 아름답습니다만.

사람 앞에서 확실하게 시인하는 믿음을 주님께서는 더욱 귀하게 여기십니다.

시인하면 시인하시고 부인하면 부인하시리라.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 목사

 

2025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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