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 16:21ㆍ말씀 묵상
주님께서는 제자 공동체가 구할 첫번째 기도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하셨습니다.
신령한 공동체라고,
먹고사는 문제를 결코 등한시 말아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 사이비 이단의 괴수들은?
신령한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속으로 이권을 챙기기에 얼마나 약삭빠른지요?
혀를 내두를 정도로 민첩하고 귀신처럼(?) 기민합니다!
교회 지도자인 목사들이,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 굶주린 무리들에게,
5병 2어의 기적과,
7병 2어의 기적을,
베푸셨겠습니까?
교회가 신령한 공동체인 것은 분명합니다만.
하늘에 뜬구름 잡는 것에 열중한답시고,
이 땅의 현실 문제를 외면한다면?
주님께서 행하신 이적의 참 뜻을 외면하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범하는,
치명적인 실수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공동체를 위한 두번째 기도입니다.
한번에 끝내기 보다는 나누어 묵상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종합할 때,
"죄"는 빚이나 부채를 포함해서,
도덕적이고 영적인 것까지 아우르는 것입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실수나 과오는 물론,
의도적으로 손해를 끼치거나,
의도하지는 않았어도 결과적으로 뒤통수를 친 것까지도,
포함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피차 서로에게 실수하고,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할 뿐아니라,
서로 손해를 끼치기도 하거니와,
폐를 끼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피차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최상일 터.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뒤통수를 치지 말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손해를 끼치거나 뒤통수를 쳤다면?
그 이상을 보상하거나,
진솔하게 그 사람이 용서하기까지,
사과하는 것이 상식과 성서의 정신에 부합할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미명하에,
은혜라는 말에 버물러서,
금전적인 손실이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를,
적당하게 퉁치려 말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명심할 말씀이 황금률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을 "입장 바꿔 생각하면"?
나는 과연 어떤 대접이나 해결책을 바랄 것인가?
암튼 모든 사람들은,
여러 환경과 조건에서,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살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덕을 세우고,
피차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최상입니다만.
그렇지 못했을 때는?
진솔한 사과가 필요합니다!
언제까지?
그 사람이 받아들일 때까지!
2차 대전의 전범국가인 독일과 일본이 취한 태도를 보면은?
더욱 악랄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국가는 독일입니다.
물론 일본도 못지 않게 악랄한 전범국가입니다.
그런데 전쟁 이후,
피해국가나 피해 당사자에 대한 태도는?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독일의 지도자들과 국민의 정서가 성서적이요,
신앙과 복음에 합당하다는 것을 전 세계가 인정합니다.
일본은 소수의 양심적인 사람들만 인정하고 사과할 뿐,
대다수 지도자들과 국민 일반은?
감추고 부인하고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깨달을 이유조차 모르는 그런 사람들에게,
사과를 바라거나,
배상이나 보상을 구걸할(?) 것 까지는 없지 않을까요?
변하지 않을 일에 너무 에너지를 낭비하거나,
감정 소모를 하지 않는 것이,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건강에도 유익할 터!
대한민국의 실력을 기르고,
경제력과 도덕적인 힘을 향상시켜서,
스스로 굳게 서고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할 수만 있다면,
죄는 물론 빚이나 부채도,
재산상 손해나 명예훼손도,
끼치지 않도록 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덮어주고 용서하며 사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순종하는 복이니까요.
그러나 용서하기 쉽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믿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너무 가슴앓이 하지 말 것입니다.
살며시 감추고,
잊고 살며 넘어가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만나지 않고,
생각하지 말며,
엮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대로 용서할 수 있다면?
스스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요,
성령의 감동 안에 사는 신령한 사람이며,
마음의 그릇이 큰,
통 큰 사람임을 확증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쉽게 용서가 안 되면?
당장에 용서되지 않는 것을,
쉽게 용서하려고 헛심(?)쓰지 말 것입니다.
억지로 용서하려고 감정을 소모하지 말 것입니다.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도 있거니와,
그 사람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도 있으닌깐요.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니라"(눅 17:3-4)
용서의 전제는,
"회개하거든"입니다.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근거는,
죄 지은 사람이 "내가 회개하노라" 하는 것입니다.
회개도 없거니와,
회개할 마음조차 없거늘,
잘못했다는 의식 자체도 없거늘,
용서 못해서 스스로 가슴앓이 하는 우를 범치 말 것입니다.
쓸데 없이,
오지랖을 넓히는 것은,
나만 넘어지고 자빠지게 할 뿐아니라,
여차하면 코가 깨지기 십상이니까요.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목사
2024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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