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10. 12:57ㆍ말씀 묵상
요즘은 많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만.
지금도 선포할 말씀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물론 설교는 기다림과 묵상과 기도와 땀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왜 기다림에 올인할까요?
바로 이 말씀에 대한 오해와 착각으로 벌어지는 일입니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9-20)
새번역이나 다른 성경은 대부분 성령 대신 아버지의 영으로 번역합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 10:20 새번역)
성령이라 번역하든,
아버지의 영으로 번역하든,
바로 이 말씀에 대한 착각과 오해로,
피와 땀과 눈물과 정성으로 준비해야 할 말씀을,
오로지 강단이나 기도실에 앉아서,
기다림과 기도로(?) 대체하려는 사람들이,
지금도 없지 않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말씀을 주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이 감동하실 수 있습니다.
소위 직통 계시(?)를 얼마든지 주실 수도 있거니와,
사람과 형편에 따라서 얼마든지 받을 수도 있습니다.
명심할 것은 이것입니다.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 사이비가 되거나,
이단으로 기울거나,
크고 작은 교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해하고 갖다 붙이는,
주님의 말씀은 우선 전제가 다릅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주시는 것은?
구원의 주님을 배척하고,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파송된 제자들을 송사하고 채찍질하고 핍박할 때를 전제합니다.
그런데 핍박도 없는 평화시대에,
강단에 가만히 앉아서 말씀을 기다린다?
언어도단입니다.
연목구어입니다.
그러니 엉뚱한 생각에 이끌려,
하나님의 뜻과 괴리된 소리를 지껄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게 하거니와,
세상을 어지럽게 합니다.
물론 그 정신 없는 소리에,
박수 치며 끌려가는 사랄들이 많습니다.
직통계시처럼(?) 떠벌리고,
때로는 으름장을 서슴지 않으니,
잠시 신령하게(?) 보일 수가 있거든요.
그러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이비와 이단에 빠졌다가,
인생 파탄나고,
초점 잃은 눈동자로 먼 산만 바라보며,
폐인으로 살던 사람들의 눈동자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선포할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며,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성령을 조롱하는 일입니다.
학위 논문 표절로,
공직에 임명되면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들이,
심심찮게 있었습니다만.
그에 못지 않게 설교 짜깁기로,
홍역을 치르는 목사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요즘은 컴퓨터와 AI로 말미암아,
클릭과 자판만으로도,
설교도 논문도 쉽게 만드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날로 먹으려다가는?
머지 않아 목사도 AI로 대체 되고 말 것입니다.
정신 바짝 차릴 일입니다.
어떻게?
내가 선포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피와 땀과 눈물과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벧전 4:10-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벧전 4:11)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고"(새번역)
제가 설교자로서 평생 품고,
준비할 때마다 고민하며 몸부림한 말씀이,
바로 벧전 4:11절입니다.
과연 지금 내가 선포하려는 이 설교가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가?
기도와 독서와 묵상과 경험으로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이 설교가 과연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부합한가?
돌아보면 부족하기 짝이 없습니다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려고,
애쓰고 몸부림친 것은 사실입니다.(딤후 2:15)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 목사
2025년 4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