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29. 09:39ㆍ말씀 묵상
칠흑같은 어둠을 경험해 보셨나요?
요즘에는 놀이시설에 가면 순간 아무것도 안보이는 공간들이 있습니다만.
완전한 어둠을 잠시라도 경험해보면 빛의 고마움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군복무시절 덮개가 없는 화물열차에 폭발물을 싣고 화물 위에서 공무를 수행하면서 칠흑같은 어둠을 잠시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철로가 직선처럼 보이지만 대부분 곡선이듯, 터널 또한 거의 곡선입니다.
긴 터널구간이어서 입구도 출구도 안보이니,
나라는 존재가 있나 없나를 확인하려고 오른 손으로 왼 팔을 꼬집어 보았습니다.
다행히 팔은 아팠고,
기차의 화통소리가 그 순간만큼은 소음이 아니라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소중한 이웃이었습니다.
꼬집어서 아픈 것이 내가 존재한다는 고마운 증거물이요,
고막에 거슬리는 바퀴소리와 경적 또한 내가 살아있기에 함께 할 수 있는 동반자였습니다.
칠흑같은 어둠의 공간에 물을 채우고 쥐가 얼마나 견디는가를 두가지로 시험해 보았더니,
바늘구멍만한 한 줄기 빛을 보여준 쥐는 36시간을 견뎠는데,
완전하게 빛을 차단 당한 쥐는 13분만에 익사하더랍니다.
36시간과 13분이라!
소망이 있고 없고가 생명의 관건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적나라하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철학자 키엘케골은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설파했고,
아우슈비츠라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의학자 빅토 프랭클은 "의미 의지"를 생명의 요소로 주장하며 "의미 치료법"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박해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부활신앙으로 산 소망을 가지라고 강권합니다.(벧전 1:3) 즉 부활신앙이 사람을 살리는 소망이니 부활신앙으로 살면 그 어떤 시련도 견딜 수 있거니와 마침내 하늘나라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으로 중생하면 산 소망이 생기고 하늘에 간직된 기업을 잇게 됩니다.(벧전 1:4)
그러므로 십자가 대속으로 구원받은 성도라면 마땅히 하늘에 믿음의 닻을 내리고,
잠깐 있다 없어질 것 말고 하늘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소망에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누가 뭐라해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나는 하늘시민권자입니다.(빌 3:20-21)
그러므로 하늘에서 영광스런 신분으로 변화될 소망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바로 그 소망으로 썩지 않는 기업,
바로 그 소망으로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하늘나라에서 이어받게 되었으니 환난과 핍박 중에도 견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시대 같은 기독교 박해를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들조차 부활신앙으로 중생하여 산 소망으로 살았거늘.
하물며 오늘 이처럼 복음이 자유롭게 선포되는 세상에서 더더욱 산 소망으로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왜요?
때로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
주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환난과 핍박 그리고 손해를 본다는 것들이 사실은 내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들이니까요.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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