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1. 09:50ㆍ말씀 묵상
다윗 인생의 변곡점인 밧세바 사건에서 주목할 사람은 먼저는 다윗이요 다음은 우리아입니다.
다윗과 우리아만 묵샹해도 바쁜지라, 솔직하게 말하면 밧세바나 요압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묵상을 받은 신실한 장로 벗님께서 댓글을 보내왔습니다.
"우리아에게서 건네 받은 다윗의 편지를 읽은 요압에게 있었던 주군 다윗에 대한 심정을 알려 주세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답을 했냐고요?
"ㅎㅎㅎ 장로님께서 짐작하신대로"
그랬더니 신실한 장로 벗님께서 보내 온 글.
"요압은 순종자(?), 가담자(?), 다윗에 대한 비수 하나를 깊이 간직해 둔 자(?)"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구먼. One of them and all that."
복되도다!
이런 신실하신 장로님들이 섬기는 교회의 목사와 교우들이여!
바로 이런 교우들이 모인 교회의 목회자는 목사로서 믿음의 진보를 이루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벽을 깨우며 영성을 갈고 닦아 말씀의 깊이와 능력을 맛보아 알면서 교우들에게 생수를 공급하게 될 것입니다.
교우들, 특별히 장로님들의 생각이 이렇게 건실하고 은혜를 사모하며 말씀의 깊이를 분별하는 눈빛이 뚜렷하거늘 어찌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을 수 있으랴?
신실한 벗 장로님과 묵상에 대한 글을 주고 받자니 자연스레 베뢰아 사람들에게 생각이 미쳤습니다.(행 17:11)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그들 선조들에 대한 평가를 자랑스러워 하며 베뢰아 마을 입구에 돌비를 새워 기념하고 계승하려는 베뢰아 마을 사람들이 부러웠던 순간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요압의 속내를 좀 더 깊고 밀도있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압은 적의 성을 포위하고 있다가,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적의 저항 세력이 가장 강한 곳에 우리아를 배치하였다."(삼하 11:16 새번역)
모름지기 요압은 자기도 언제 다윗에게 버림을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과 경계심을 놓지 않았으리라.
다윗의 허락도 받지 아니하고 동생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을 죽인 죗 값 일부를 갚았다고 다소 안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의 약점 하나를 쥐었노라고 다소 우쭐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과 비교해 볼 때 오만가지 상념들이 오고갔으리라는 것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악인들이 서로 손을 잡는다고 죄악이 결코 분담되는 것이 아니거늘.
사람들은 여러 사람이 손 집고 죄악을 저지르면 자기 죄나 실수는 1/n로 줄어드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인간 심리의 심연을 깨닫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왕조시대인지라 다윗의 편지 속 요청이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있습니다만.
훗날 다윗의 유언에 따라 솔로몬에게 척살 당한 요압을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들 처신에 경계로 삼아야 하리라.(고전 10장)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누군가를 일깨워 믿음에 굳게 서도록 도와주는 사람.
죄악의 톱니바퀴 속으로 끌려들어가지 아니하고 비켜 설 줄 아는 복있는 사람.
시험에서 옳다 인정을 받고 면류관을 받는 사람으로 오늘도 살아갑시다.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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