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사에게 이르기를
인사가 만사.
동시에 인사는 망사.
사람을 적재적소에 잘 쓰면 만사가 잘 해결됩니다.
반대로 깜냥이 안되는 데 자기 사람이라고 쓰면 망하는 지름길이 됩니다.
다윗이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동원해서 쓰리 쿠션 복귀작전을 편 것은,
그만큼 민심이반이 컸다는 것이며,
다윗의 입지가 흔들렸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유불급.
아무리 반란세력을 품는 정책과 인사를 한다해도 아마사를 군대 총 지휘관으로 삼는 것은 지나칩니다.
물론 2인자로서 요압의 처신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반란군의 군 지휘관이었던 아마사를 차기 군 사령관으로 낙점하다니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다윗의 무리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삼하 19:13)
다윗의 착각입니다.
관용과 포용은 필요한 정책이로되 시점과 스피드가 맞아야 할 것입니다.
천년제국 로마의 관용.
이민으로 이루어진 나라를 세계 최강으로 만든 아메리칸드림.
세계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발전한 대한민국.
원조 수혜국에서 원조 공여국이 된 대한민국.
계속 발전하고 강성해가려면,
국민정서의 대전환과 획기적인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아무튼 노련하면서도 노회한 다윗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을 통해서 민심을 다독이고,
쓰리 쿠션 귀환작전에 유다 장로들을 동원한 것까지는 좋습니다만.
요압 대신 아마사를 낙점하고 천명한 것은 과유불급입니다.
게다가 무슨 하나님까지 동원합니까?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범하기 쉬운 실수요 착각입니다.
결코 기도도 해보지 아니하고.
성경에 합당한 결정인지 분별도 아니하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선택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아니하고,
대뜸 하나님을 갖다가 붙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목사들이 착각하며 범하기 쉬운 실수입니다.
교회생활 오래 했다는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착각입니다.
기도도 아니하고,
분별도 아니하고,
인도하심도 따르지 아니합니다.
그저 자기 생각에 떠오르는 것들을,
하나님의 섭리나 인도하심으로 착각하며 범하는 치명적인 실수입니다.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거만한 자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느니라"(잠 24:9)
이 말씀은 여러 각도에서 묵상하고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련을 넘어 그 미련한 생각에 집착하면,
자신도 모르게 죄를 범하게 될 뿐아니라,
마침내 사망과 패망으로 귀결됩니다.(롬 6:23, 잠 16:18)
성경을 읽을 때마다,
"너희는 그리하지 말라"(고전 10)를 되새겨야 할 이유입니다.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