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을 위해 목숨까지
이제 삼하 14장을 마치려 합니다.
압살롬의 귀환작전에 동원된 요압과 드고아 여인의 각본과 열연은 다윗을 감동(?)시켰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2년 동안이나 다윗을 보지 못한 압살롬이 요압의 보리 밭에 불을 지르기까지 소통에 미적대는 요압의 모습에서 을들을 무시하는 갑들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목숨을 담보하는 강경책에만 반응하는 사회는 소통에 둔감하여 처절한 댓가를 치르기 십상입니다.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이 사람을 네게 보내 너를 이리로 오라고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 아뢰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 때까지 거기에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 하는지라"
왕의 얼굴을 보기 위헤서 목숨을 걸어야만 한다면?
그런 세상은 병든 세상입니다. 폭력이나 다른 강경책을 동원할 수밖에 없으니 피차 엄청난 댓가를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왕정시대에도 지혜로운 군주가 옹립되거나 충성스런 신하들이 즐비하던 시대에는 백성들의 아픔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나 수단을 마련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제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탑이 세워진 정읍 내장호수 주변을 돌아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민초들의 요구를 관철하고 혁명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치른 댓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살이 떨리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 처절한 댓가를 반복해서 치름으로써, 오늘 이 밝은 세상이 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새삼 선각자들의 수고와 희생에 고개를 숙이고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압살롬이 착각한 것처럼 압살롬의 죄는 지금 전혀 해결된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국법으로도!
다만 시간만 5년이 흘렀을 뿐입니다.
왕이지만 아버지로서 아들을 대하는 애틋한 감정만 작동되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구에게 묻더라도 익명으로 대답하라면 잘 해결되었다고 긍정적으로 대답할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으리라.
다만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삼하 14장을 살펴볼 때, 다윗에게도, 요압에게도, 그리고 압살롬에게도 문제투성입니다.
압살롬이 목숨을 걸기 전에 어떤 형태로든 만나서 소통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라는 입장에서는 이해한다손 치더래도 신정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왕의 처신으로는 이해 받기 어렵습니다.
요압 또한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고 차일피일 했겠지만 수확을 앞 둔 보리 밭이 불타고서야 압살롬을 찾았다는 것은 소통력 부족을 변명할 길이 없습니다.
물론 압살롬 자신도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스스로 말한 것처럼, 죽을 죄를 지은 사람으로서 소통에 꽝일 뿐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답답하고 꽉 막힌 소통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숨통이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과 소통의 길이 언제라도 열렸다는 것이 우리에게 소망입니다.
강경책을 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들으십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구하는 것은 물론 생각하는 것에도 넘치도록 응답하시니 그 어찌 감사하고 기도하는 것을 멈추랴?(엡 3:20,
마 7:7-11, 렘 33:3, 빌 4:6-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부르짖음 그리고 감사와 탄원에 저리도 응답하시거늘!
하나님의 자녀 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싸인에 얼마나 귀를 열고 눈을 뜨고 마음을 열고 응답하고 있습니까?
오늘도 "에바다" 탄식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을 열고,
입으로 손으로 발로 그리고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제물로 살아갑시다.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