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정쩡한 다윗의 처신은?
오해는 마십시오.
무엇을?
삼하 14장을 묵상하면서 요압과 드고야 여인의 합작품인 압살롬 귀환작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목적 성취를 위한 열심과 간절함 그리고 수단을 배우자. 그래서 믿는 사람이 더 지혜롭고 하늘소망으로 더 간절하게 살아가자는 의도일 뿐입니다.
결코 요압이나 드고야 여인의 삶을 긍정하고 수용하자는 취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압과 드고아 여인의 압살롬 귀환작전에 감동을 먹은 다윗은 어정쩡힌 태도로 압살롬의 형제살인이라는 죄에 눈을 감습니다.
이는 달매에게로 도망간 압살롬을 얼마든지 잡아들여 공의를 세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 감은 실수에다가 또 한번 죄를 청산할 기회를 놓친 셈입니다.
"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삼하 14:23-24)
회개 없는 용서는 결코 자유도 생명도 없습니다.
징계 없는 죄악은 점점 더 큰 죄악으로 빠져들기 십상입니다.
사랑과 공의는 언제라도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반드시 그 댓가를 치루어야 할 때가 옵니다.
다윗이 암논의 죄를 눈감았을 때 형제살인으로 돌아왔습니다.
압살롬의 죄를 어정쩡하게 봉합하니 결국은 반란으로 나라가 절단날 뻔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가 십자가에서 만나게 하십니다.
죄를 눈감자니 방종과 타락이 불 보듯 뻔합니다.
엄정한 율법과 공의를 들이대자니 주님 앞에 설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시 130:3-4)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십자가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대속물로 내어주심으로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실현하셨습니다.
바로 이 사랑과 공의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매 멋대로 방종하고 살아도 됩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종의 멍에를 메고 육체의 욕망을 따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강권함을 받아 사랑으로 종 노릇 하는 것이 진정한 제자의 도리입니다.(갈 5:1, 13-15, 고후 5:14-21)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