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략결혼의 희생양 미갈
그동안 목회하면서는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삼하 3:13-16절 말씀을 묵상합니다.
정략결혼의 희생양 미갈과 또 하나의 희생양 발디엘의 순애보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다윗 왕가와 사울 왕가의 합병이 아브넬의 변심(?)으로 공공연하게 추진되는 가운데, 다소 생뚱맞게 미갈을 데려오라는 제안을 다윗이 아브넬과 이스보셋에게 합니다.
미갈을 다시 데려오지 않는다 해도 두 왕국 합병은 이루어질 일이거늘, 한 가정을 깨트리면서까지 또 다시 정략결혼을 시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일이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힘 없는 민초들의 비극이여!
"다윗이 이르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을 맺거니와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 올 때에 우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
다윗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전령들을 보내 이르되 내 처 미갈을 내게로 돌리라 그는 내가 전에 블레셋 사람의 포피 백 개로 나와 정혼한 자니라"(삼하 3:13-14)
미갈.
사울의 딸이자 다윗을 흠모하던 공주로서, 아버지 사울 왕의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된 비운의 주인공입니다.
물론 목숨 걸고 다윗을 살려 보낼만큼, 진실하게 다윗을 사랑한 첫사랑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울의 정적이 되어 도망을 다니는 동안에 발디엘과 가정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세월도 흐르고 이제는 안정을 이루며 살만하거늘. 평지풍파를 일으킬게 뭐람?
그런 미갈을 다시 정략적으로 취하려는 다윗의 시도는 아무리 좋게 보려해도 또 다른 정략결혼에 불과합니다.
이미 가정을 이루어서 행복하게(?) 살고 있거늘, 왕이 되었다는 것을 과시라도 하려는 듯, 언약을 맺자는 아브넬의 제안에 덥썩 미갈을 데려오라는 조건을 붙이고 동시에 이스보셋에게도 겁박하듯 전갈합니다.
또 다른 희생양 발디엘은 어찌 하라고?
힘이 없는 발디엘은 울며 따라 오다가 아브넬의 겁박에 한을 품은 채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삼하 3:15-16)
왕조시대의 정략결혼을 오늘의 잣대로 따진다는 것은 무망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 자신이 정략결혼의 폐해를 보았거니와, 바로 그 미갈 덕에 목숨까지 건진 은혜를 입었으니, 아무리 권세 잡은 왕이라도 최소한 미갈의 의사는 타진해야 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정략결혼의 폐해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또 다른 피해자 발디엘에게 눈물과 한을 심어준 것은 사울 왕가를 계승한다는(?) 인간적인 술수에 지나지 않는 또 다른 정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는 말씀을 되짚어 볼 때, 주님의 마음이 흐믓할 리가 없습니다.(마 25:40)
결국 미갈은 데려왔지만, 동침도 아니하고 자식도 없었습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사울 왕가를 계승한다는 정략결혼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삼하 6장)
훗날 자식들의 반역과 권력다툼으로 귀결된 것은, 한을 품은 미갈과 가정을 잃고서도 "꽥" 소리 한번 못한 발디엘의 한을 주님께서 들으시고 심은대로 거두게 하신 것이리라.(약 5:1-6, 갈 6:7-8)
물론 오늘 이 시대는 왕조시대도 아니고, 정략결혼도 재벌가나 혹은 정치나 권력 블럭끼리 은밀하게 오가지만, 본인의 암묵적 동의(?)가 없다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서푼어치도 안되는 자기 권세를 가지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을 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비정규직들의 눈물, 일용직들의 한, 기득권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차별.
특별히 코리안드림을 품고 온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한을 심는 일은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대가를 치루게 하십니다.(약 2:13)
내가 가진 권세를 선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내가 끊을 수 있을 때 절제하며 잘 끊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새출발을 주님께서 기대하십니다.(고후 5:17)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책임 진 부분이라도 온기가 나누어지면 주님께서 미소지으실 텐데....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