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을 보며
삼하 3:2-5절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왕노릇을 하는 동안 여섯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합니다.
당연하게 3:1절 말씀이 성취되어 다윗이 점점 강하여 가는 모습을 예증하는 말씀이리라. 이어서 기록된 삼하 3:6-11절에 사울 집안의 내분을 통해 점점 약해지는 것 또한 3:1절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여섯 아들을 여섯 부인에게서 낳았다고, 아들 하나 하나 마다 어머니가 다른 것을 자세하게 기록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신 17:17절은 왕의 금기사항으로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엄명합니다.
태초에 사람을 지으시고 갈비뼈로 돕는 배필을 지으신 까닭은, 일부일처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명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
일부다처가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구태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들 필요가 없었으리라.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정욕에 물들어 일부일처가 무너집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 조차도 사라의 청을 받아들여, 하갈을 첩으로 받아들입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은 낳았지만, 그 아들을 내쫓으면서 얼마나 갈등과 근심이 많았습니까?(창 21:11)
선민 이스라엘과 대척점에서 지금까지 계속되는 갈등과 전쟁의 폐해는 고스란히 후손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함께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 다윗조차도 수많은 처첩들을 거느리다니요?
말씀의 경계를 벗어난 다윗은 잠시 흥왕하고 번성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뼈아픈 골육상잔이라는 처절한 댓가를, 다윗이 심은대로 거둡니다.(삼하 13-18장)
40년 목회 중 가장 큰 실수(?) 하나.
전임 전도사 시절 교단 최대 교회에서 시무를 했습니다. 교회가 큰 만큼 공휴일(?)에 당직을 섭니다. 자기 담당 교구가 아니어도 갑작스런 목회적 돌봄상황이 발생하면 목회를 대행하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초상이 발생했습니다. 다른 교구이니, 전혀 모르는 교우가정에 부친상 위로차, 연세대학 병원 장례식장에서 임종 위로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의 믿음을 본받아 믿음 잘 지키는 자녀들과 가족이 되기를 기도하고 권면했거늘"
다음 날 담당 교역자에게 확인한 사실은. 작은 부인을 두고 갈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나?
그때 뒤통수가 뜨겁고, 얼굴이 화끈했던 경험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부끄럽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물론 교인카드는 들고갔지만 교인카드에 그런 사항이 기록될 수가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닙니까?
몰라서 실수했습니다만, 실수는 실수.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그때 반성 많이 하고, 그 후에 그 가족을 위해 축복과 은혜를 많이 구했습니다.
성경에 종과 노예가 기록되었다고, 성경이 노예제도를 용인한다고 억지(?) 주장을 해대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지금도 가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처첩들을 두고 살았다며, 일부다처를 주장하는 정신 나간(?) 주장을 해대는 사람 또한 있습니다.
완악한 시대에 용인하던 제도나 관행은 계시의 점진성과 해석의 진보에 따라 없어져야 마땅할 것입니다.(마 19:1-8, 행 17:22-31)
종교개혁자 깔뱅은 "우리의 죄악을 변명하기 위해서 다윗을 인용하지 말라"고 일갈합니다.
비록 다윗 왕일지라도 하나님의 법도를 벗어난 불신 결혼이나 정략 결혼 혹은 축첩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완악하여 묵인 한 것을 축복으로 착각하지 말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는 편에 서는 것이 믿음이요 은혜입니다.
비록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일지라도, 선 줄로 생각했다가 넘어진 다윗을 경계로 삼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삽시다.
(고전 10:1-12, 갈 6:1-3)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