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에서 최소한의 예의
다윗의 애가를 이쯤해서 마치려 합니다.
사울의 죽음은 누가 뭐라해도 10 여 년을 쫓겨다닌 다윗에게 가장 반가웠을 터. 그러나 좋은 것을 그냥 좋아하지 아니하고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것을 애가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다윗 자신만 예의를 지킨 것이 아닙니다. 애가를 지어서 부르고, 가르치고, 명령하고, 기록하게 합니다.(삼하 1:17-18)
사울을 애도하지 못하게 하려면 그 이유가 차고도 넘칩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의 흠과 실수를 들어내지 아니합니다. 좋은 점만 기록하고 슬퍼합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관계에서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요 도리이리라.
불신 세상조차도 양식이 있는 공동체는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준수하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이리요?
우리는 인간관계의 마무리 즉 엔딩을 어떻게 합니까?
공적인 관계든지 사적인 관계든지 마지막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 다시는 생각하기조차 싫을만큼 인색하고 냉정합니까? 다시는 안볼 사람처럼 처신해서야 어찌 하나님의 자녀라 하겠습니까?
언제 어디서 심지어 천국에서 만날지라도 반갑게 손잡을만큼 엔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식적인 관계는 청산될지라도 두고두고 그리워 할만큼 따뜻하게 처신하는 것이 복입니다.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부른 애가와 조사는 우리의 믿음의 옷깃과 인간관계의 예의와 도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은 살아 있을 때에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구나! 독수리보다도 더 재빠르고, 사자보다도 더 힘이 세더니!
이스라엘의 딸들아, 너희에게 울긋불긋 화려한 옷을 입혀 주고, 너희의 옷에 금장식을 달아주던, 사울을 애도하며 울어라! 아, 용사들이 전쟁에서 쓰러져 죽었구나!
요나단, 어쩌다가 산위에서 죽어 있는가?"(삼하 1:23-25)
사울이 그토록 집요하게 다윗을 제거하려고 모질게 다룬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릴 터인데. 인격과 행위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따지자면 차고도 넘칠 터인데.
그 모든 문제점을 하나도 언급하지 아니합니다. 좋은 점만, 잘한 것만 깔끔하게 언급하고 노래합니다.
그러니 사울의 문제점을 40년 동안 겪었을 백성들이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아하!
다윗의 신앙과 인격 그리고 리더십이 신뢰할만 하구나!
우리들의 가족과 민족의 장래를 믿고 맡길만 하구나!
다윗이라는 그릇이야말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우리 열 두 지파 선민 공동체를 충분히 아우를만 하구나!
저주를 좋아하면 저주가 임하고 복이 떠납니다.
악을 선으로 갚으면 기도가 품으로 돌아옵니다. 심는대로 거두는 것이 자연법에서도 영적인 것에도 순리입니다.(시 35:12-13, 109:17-18, 갈 6;7-10)
친히 원수를 갚으려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면서 먹여주고 마셔주라 말씀하십니다.(롬 12:19-21)
내가 힘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심는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역사가 이것을 충분하게 평가합니다.(삼하 3:1. 5:10)
오늘도 하나님 편에 서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며 살아갑시다.(갈 6:1-3)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