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리지 않는 속담
삼상 19장 끝부분에 어울리지 않는 속담이 기록되었습니다.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19:24)
"사울도 예언자가 되었는가?"(새번역)
미갈의 도움으로 시간을 벌고 도망친 다윗이 사무엘이 살고있는 라마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사울이 다윗 체포조를 라마 나욧으로 보냈더니 체포 대신 예언을 하게 됩니다.(삼상 19:20)
소식을 접하고 발끈한 사울이 다른 체포조를 보냈는데 그들도 예언을 하면서 다윗을 체포하는 그들의 임무를 잊어버립니다.
노발대발한 사울이 역정을 내면서 반드시 다윗을 체포해 오라고 세 번째 체포조를 보냈다는 것은 안봐도 비디오.(삼상 19:21)
그런데 세 번째 체포조마저 예언을 하면서 신비한 경험 속에서 다윗 체포라는 임무를 망각합니다.
이쯤되면?
아무리 미련 밤퉁이라도 하나님께서 막으신다는 것을 알고 자기 생각이나 결심을 바꾸어야 마땅하지 아니한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울은 생각을 바꾸기는커녕 오히려 자기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다윗을 잡으러 옵니다.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삼상 19:23-24)
다윗 체포조를 세번이나 보냈는데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을 하면서 체포하는 책임을 잊었다면?
마땅히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생명길이거늘.
그랬더라면 어울리지 않는 속담의 주인공은 면하였으리라.
오히려 사울 자신이 직접 나서서 다윗을 체포하렸더니 이번에는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을 하고 하루 밤낮을 사무엘 앞에서 벗은 몸으로 누워지내는 경험을 하면서 다윗 체포는 몰거너 갑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체포조를 세번이나 보내고도 체포에 실패하고, 사울 자신이 직접 다윗을 체포하려다가 자신조차 예언의 신비 속에서 다윗 체포라는 자기 욕심을 잊어버렸다면, 다음 수순은 마땅히 자기 생각을 바꾸는 것이 순리 아닌가?
그런데 어울리지 않는 속담이 성경에 기록됐다는 것은 사울이 여전히 자기 생각을 관철하려고 고집을 부렸다는 것을 만천하에 나팔을 부는 것이리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이런 미련 밤퉁이를 봤나?
마땅히 생각을 바꿔 살길을 찾아야지.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평생 다윗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사망길로 내려가는 미련한 인생 대표자가 되다니?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생각을 맛보아 알았거든 자기 생각을 바꾸고 뜻을 접는 것이 좁은 문이지만 생명길이거늘!(시 34:8, 사 55:8-13, 마 7:13)
미련한 사람이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종착역은 사망입니다.(잠 24:9, 약 1:15)
죄에 끌려 사망길로 빠진 사람을 보거든 영적으로 살아야 하는 경건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두려워하고 기도해야 합니다.(갈 6:1, 마 26:41)
육신의 정욕에 끌리기 쉬운 약점이 많을수록 기도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울리지 않는 부정적인 속담을 만들거나 따르는 비극인생 말고,
기왕이면 감동적이고 잘 어울리는 속담을 만들어 가는 발자욱을 남기는 것이 복이리니.(막 14:9, 마 8:10)
우리가 밟은 발자욱과 걷는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명과 축복 그리고 은혜를 넉넉하게 누리도록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가는 오늘을 사십시다.(갈 6:2)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