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슬퍼할래
성경을 통틀어 볼 때 가장 흥미진진한 장면 중 하나가 삼상 16장일 것입니다.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택해서 기름을 부으셨다고 단순화시키면 그것으로 끝.
그러나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면 하나하나 생각거리와 묵상할 부분들이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진도 빼는 것에 매인 몸이 아니고 자유인인 것을 되새기며 최대한 여유를 부리면서 묵상의 호사를 누려볼 터.
묵상의 호사야말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축복과 특권임을 다시한번 확인하면서 스스로 "콜?" "콜!"
먼저 삼상 16:1절입니다.
"사무엘아 너 언제까지 슬퍼할래?"
사울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선민 이스라엘 공동체의 미래가 깜깜해서 코를 빠트리고 두문불출하며 슬픔에 젖어있는 사무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언제까지?"
이것은 시간의 문제입니다.
믿음은 과거에 매이는 것 아니고 미래지향적인 것입니다.
선택해서 기름을 부어 왕이 된 사울이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택하심을 후회하시게 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계속해서 그 일에 매여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는 것은 건강한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너 언제까지 슬퍼할래?" 하십니다.
의문문이지만 의미로 보면 강한 부정을 내포한 말씀입니다.
슬픔을 뚝 떨쳐내고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과거지향이 아니고 미래지향이라는 사실을 명념합시다.
그럼 과거는 어떻게?
잘한 것은 하늘상급 바라보며 잊어버려.
내가 잊어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칭찬하시고 축복하시리라.
잊어버려야 부족한 줄 알고 분발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니까요.
잘못한 것들은?
회개하고 돌이켜 용서를 받은 것이 확실하거든 그 또한 매이지 말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받았거든 사람에게 입힌 상처나 손실 또한 보상하거나 배상하고 용서를 빌며 관계정상화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가장 잘못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착각(?)하고 사람에게 저지른 실수와 손해를 퉁치는 불신행위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롬 2: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오늘 용기를 내서 사람에게 용서를 비는 것이 진짜 믿음에 속한 자의 일입니다.
물론 경제적 손실을 끼쳤거든 갚는 것 또한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신앙은 영원히 미래지향적입니다.
언제까지?
천국에 가서 주님을 뵈올때까지!
그러므로 하늘나라에 소망의 닻을 내리고 하늘상급과 축복을 맛보고 누릴 때까지 한걸음 한걸음 전진해야 합니다.(히 6:19)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 사모하는 것.
부활의 신비를 헤아리는 것.
새 하늘 새 땅에서 누릴 축복을 생각하며 이땅에서 참고 견디는 것이 건실한 미래지향적인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묵상이 길어질 것 같아서 히 12:1-3절 새번역으로 마치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않으셨습니다.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