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마음판에 새긴 흔적

전주산돌 2022. 1. 13. 11:44

오래된 마을을 가보면 공적비나 효자비 혹은 열녀비가 세워졌습니다.
세월이 흘러 돌이 마모되거나 글자가 훼손된 것들도 많습니다만,
그래도 돌비에 새긴 것만큼 오래가는 것도 없습니다.

여호수아 4장을 읽을 때마다 내게 가장 크고 깊게 다가오는 말씀은 14절 말씀이었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가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그를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 같이 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젊은 시절부터 이 말씀에 필이 꽂혀서 이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고 이 말씀의 축복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으로 자녀들을 축복하고 교우들을 격려하며 마음과 정신에 꿈을 심어 주었습니다.
말씀의 축복이 때가 되면 싹이 나고 담장 넘어로 가지를 뻗어서 열매를 맺으리라.

그런데 오늘은 길갈에 새운 돌비와 요단강에 새운 열 두 돌비를 묵상하고 싶습니다.

성지 이스라엘의 순례 필수 코스인 마사다를 가면 안내하는 이스라엘 직원이나 교육 중인 학생들의 모자나 옷에 글귀가 특별합니다.

"Never Again Never Masada"

얼마나 크고 깊게 원통하면, 
저렇게 처절하면서도 극명한 슬로건으로 국민들의 의식을 고취시키랴?

작금의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기구 거주민 사이의 분쟁을 보면 너무 심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주변이 아무 것도 안보일만큼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숨막히는 현장을 보면 정말 징그럽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로마의 침략으로 마사다에서 몇명의 아이 외에는 전멸 당하고, 
2,000년을 나라 없는 민족으로 유리방랑했던 비극과,
나치 히틀러에게 600만이 학살 당한 역사적인 트라우마를 간직한 비운의 공동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속히 팔레스타인에 주님의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길갈에 새운 열 두 돌비.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넌 후 그곳에 새운 열 두 돌비.
어찌 되었을까요?

숙영지 길갈에 새운 돌비도 성경에 기록만 있을 뿐,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요단강에 새운 돌비도 요단 물이 흐르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리라.(수 4:18)

그렇다면 우리더러 어떡하라고?

요단강을 건널 때 강물이 강둑이 되었다는 기념물로 간직하고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마음판에 새겨주라는 것입니다.(수 4:6-7)

대를 잇는 거짓없는 믿음의 유업을 이어주고 이어받으라.(딤후 1:5)
돌비를 넘어 마음판에 새기라.(고후 3:3)

요단강 건너서 진을 치고,
대열을 정비하며,
여리고 정복작전에 심혈을 기울이려면 얼마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습니까?

그런데도 굳이 돌비를 세우라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바빠도 은혜를 기억하고 새기는데 소홀함이 없어라!
숙영지에서 기억하라.
즉 머물고 유숙하는 잠자리에서 회고하고,
반복 기억하여 마음판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아니할 신앙의 기념돌을 삼고,
선민으로서 흔적을 간직하라는 강한 메시지입니다.

저는 마사다를 올라가서 폐허로 남겨진 황량한 돌산을 둘러보며 걸으면서 목숨을 기꺼이 바친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때마침 날아온 까마귀는 내가 선 곳 마사다 정상 주변에 세운 철제 난간에 앉아 날아 갈 생각이 없는 듯 보였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갓난 아이 주먹만한 돌맹이가 보였습니다. 그 돌멩이를 가져와서 내 책상에 두고 지금도 가끔 생각합니다.

교회를 위해 죽을 수 있느냐?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겠느냐?

이 질문을 잘못 이해하면 자기 신념과 기도응답이라는 미명과 착각으로 피흘리기까지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고 교회를 싸움터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진면목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마 5:9)

기도 많이 하면서 고집스럽게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경구가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교회가 살고
내가 살아나면 교회가 죽습니다"

내가 아니어도 주님의 교회는 영원합니다.
그런데 내 생각과 소원기도를 관철해야만 교회가 지켜지리라고 착각하고 전투적인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신념과 판단을 주님의 뜻과 생각으로 동일시하는, 
병든 믿음이요 착각일 경우가 많습니다.

진실은! 
내가 죽고 내 고집을 꺾어야,
교회가 살고,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시고, 
생명의 향기를 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고후 2:15-16)

우리들의 생각과 길 보다는,
주님의  길과 생각에 주목하고 집중하심으로,
우리들의 삶과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드러냅시다.(사 55:8-13, 갈 6:17)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