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 그 다음
출애굽기 7장 후반부터 11장까지는 애굽에 10가지 재앙이 발생합니다.
나일강이 핏물로 변하는 재앙이 첫번째고 사람의 장자와 짐승의 첫새끼가 죽는 장자재앙이 마지막입니다.
재앙 없는 인생살이가 어디 있으랴?
크기가 다르고 무게가 다르고 내용이 다를 뿐,
인생여정에 피할 수 없는 것이 재앙이리라.
신문과 방송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본 세상은 기근, 지진, 전쟁 그리고 질병과 사건, 사고로 날마다 가득합니다.
출애굽이 이루어지기까지 애굽에 내린 열가지 재앙은 다각도로 조명할 수 있거니와 자세하게 살펴보면 세밀하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만,
그리하려면 열번이나 재앙을 다뤄야 하니 묶어서 한번에 재앙 그 이후 반응만 살펴봅니다.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의 젖줄이며 개구리는 다산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축복의 상징들이 재앙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축복 그 자체에 매몰되지 말고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나일강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개구리를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니까요.
땅의 티끌이 이가 되다니?
사소한 티끌조차 하나님의 징계를 들어내는 도구도 되거니와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고 건지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소한 것조차 징계의 도구가 될 수도 있거니와 축복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기왕이면 땅의 티끌 같은 사소한 것조차 살리고 건지고 구원하는 축복의 도구로 드러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재앙을 당하는 대표선수 바로의 반응을 살펴봅시다.
마지막 장자재앙이 임하기까지 바로의 반응을 종합적으로 분별하면 미련, 고집불통, 강팍, 완강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잠언을 읽다가 놀라운 말씀을 읽고 되새기고 암송한 적이 있습니다.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거만한 자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느니라"(잠 24:9)
아니,
미련이면 미련이지!
미련한 자의 생각은 또 뭐야?
여기저기 책들을 살펴봐도 시원한 대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골똘하게 생각하고 묵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깨달은
"미련한 자의 생각"이란?
아하, 그렇구나.
미련한 것에 끌려다니는 것이구나.
미련한 자기 소신에 집착하는 것이로구나.
미련을 미련으로 알지 못하고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구나!
소신.
신념.
심지.
초지일관.
얼마나 좋은 것들입니까?
그런데 그것들이 잘못된 것들이라면?
그러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자살폭탄이라는 테러.
십자군전쟁이라는 죄악.
특정 지역이나 민족 혹은 나라를 미워하거나 배척하는 옹졸한 민족주의나 이데올로기.
미련한 자의 신념은 자기학대와 파괴로 귀결됩니다.
집단이나 공동체로 연결되면 엄청난 파괴력으로 세상을 소란하게 합니다.
바로가 가진 미련함.
바로가 버리지 못한 미련한 자기 생각.
열가지 재앙이라는 비극을 겪고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마침내 홍해바다에 수장되는 비극을 겪고서야 끝을 봤습니다.
기왕이면 재앙을 당하기 전,
좋은 말로 할 때 듣는 것이 최고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리 못했다면?
한두가지 재앙을 겪고 나서 바로 돌이키는 것이 그나마 사는 길이요 차선입니다.
반복된 재앙.
열번이나 재앙을 당하고도 고집을 부리고 불순종하는 것은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라는 말씀에 꼭 들어맞는 맞춤형 죄로서 사망에 이르리라.(롬 6:23)
재앙은 인간적으로 말하면 사랑의 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분별하면 시험입니다.
매를 순하게 받고 돌이키는 것이 지혜요 덜 맞는 첩경입니다.
시험에 옳다 인정받으면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약 1:12)
재앙 없이 인생을 하늘나라까지 순항하면 좋겠지만 그런 인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재앙과 시험과 연단 이후 오히려 생명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은혜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마 7:13, 행 3:19)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