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은혜의 갈림길에서
뼛속까지 중세인인 루터가 개혁자가 되어 "이신칭의"를 주창하여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로 개혁의 물꼬를 튼 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중세 카톨릭의 행위구원 교리의 결과는 면죄부로 타락의 정점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터는 수도사로서 엄격한 훈련과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안을 얻지 못하고,
무릎이 깨지도록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고 애를 썼지만 구원의 확신조차 얻지 못하다가,
"행위 말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갈 2:16, 롬 3:20-26)는 말씀을 깨닫고 비로소 구원의 확신을 얻고, 주님 주신 평안을 얻었으며 개혁의 선구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율법과 은혜의 관계는? 그리스도인들이 평생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율법의 행위구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왜 사람들은 율법에 집착하게 될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율법의 행위는 눈에 보이지만,
믿음과 은혜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쥘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따르는 행위들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도 만져지지만, 믿음은 만질 수도,
눈으로 볼 수도 없으니,
영으로 시작했다가도 어느 순간에 육체로 마치게 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갈 3:3)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구원받은 믿음으로 살다가도 어느 순간에 율법주의자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특별히 목사나 장로는 이 문제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차하면 율법과 도덕으로 기울어지기 십상이거든요.
물론 율법도 필요하고 도덕도 중요합니다만,
어느 누구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갈 2:16)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다 이루셨습니다.(마 5:17, 요 19:30)
십자가에서 율법과 은혜는 갈림길이 아닌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와 장로가 경건에서 멀어지고 영적으로 깨어있지 아니하면 자기에게는 은혜라는 잣대를,
남에게는 율법이라는 잣대로 들이대는
선택적 잣대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끝까지 붙들어야 할 믿음은 어떤 믿음이어야 할까요?
바로 갈 2:20 말씀입니다.
나는 죽고 내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이요 영으로 사는 것입니다.(고후 5:17, 롬 8:9-11)
그렇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야 그리스도와 함께 삽니다.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지 말고 나를 못박아야 합니다.(히 6:6, 갈 5:24)
복음의 골자는 예수님을 대속의 주님으로 믿으면 의롭다 함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내안에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시고,
예수님이 주연되시고 내가 조연으로 만족하면,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존심으로 살면 천하보다 귀한 생명으로 축복하십니다.
꼭 적절한지는 각자 분별할 몫이거니와 "김금래" 시인의
<서 있는 물>이라는 시로 묵상을 마치려 합니다.
바다가 되기 싫은 물이 있지
가던 발길 멈추고 고요히
생각에 잠기는 물이 있지
세상 물들이 모두 바다로 갈 때
나무 속으로 들어가
팔 벌리고 서있는 물이 있지
잎으로 꽃으로 피는 물이 있지
샬롬!
구멍 난 바가지 전중식목사